버블 경제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경제 역사에서 '버블'이라는 용어는 자산 가격이 비이성적으로 상승한 후 급격히 하락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 개념의 시초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사건과 18세기 영국의 남해 회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두 사건은 단순한 금융 실패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취약성과 시장의 광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에도 주식 시장이나 부동산 버블을 분석할 때 자주 인용되는데, 이는 현대 경제 위기에서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이 두 사건의 배경, 전개 과정, 붕괴 과정, 그리고 특히 왜 이러한 버블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하시는 분들께 시장의 예측 불가능성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버블 경제의 기원1 - 네덜란드 튤립사건
먼저 네덜란드 튤립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세계 최초의 대규모 투기 버블로 평가됩니다. 네덜란드는 당시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튤립은 원래 터키에서 수입된 희귀한 꽃으로, 네덜란드 상류층 사이에서는 이 꽃이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진딧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로 인한 돌연변이가 '브로큰 튤립'이라는 반점이 들어간 튤립을 만들어 냈는데 특히, 변종 튤립 구근이 등장하면서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습니다. 1634년부터 1637년까지 튤립 구근 가격은 수십 배 상승했습니다. 예를 들어, 희귀한 품종 하나의 가격이 숙련된 장인의 연봉에 맞먹거나, 암스테르담의 고급 주택 한 채 값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튤립을 재배하거나 팔지 않고, 튤립 구근 거래는 신용 거래가 많았습니다. 금융업자는 여러 종류의 튤립 구근을 사들이고 일반 투자자에게 거액의 자금을 선대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선물 시장과 유사하죠.
튤립 매니아의 광기는 사회 전반으로 퍼졌습니다. 농부, 상인, 귀족까지 모두 튤립 투기에 뛰어들었고, 일부는 집이나 토지를 팔아 구근을 샀습니다. 가격 상승은 놓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의 심리 속에서 말이죠. 사람들은 '이 가격이 영원히 오를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1637년 2월, 하를렘에서 열린 경매에서 갑자기 구매자가 사라지면서 가격이 폭락했고. 단 며칠 만에 구근 가격이 99% 하락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했습니다. 그렇게 급락한 튤립 구근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툼이 벌어졌고, 정부가 튤립 거래를 규제하면서 튤립 거품은 빠르게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버블이 발생한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과도한 투기 심리가 주된 요인입니다. 네덜란드의 경제 호황으로 인해 사람들이 빠른 부를 추구하게 되었고, 튤립의 희귀성과 아름다움이 이를 부추겼습니다. 둘째, 신용 팽창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네덜란드 은행들이 쉽게 대출을 해주면서, 사람들이 실제 소득 이상으로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정보 부족과 소문의 확산입니다. 튤립의 실제 가치 그러니까 꽃이 피는 기간은 짧고, 재배가 불안정한 요소가 무시된 채, 미래 가치에 대한 과장된 기대가 퍼졌습니다. 또한, 사회적 압력과 군중 심리가 작용해 합리적 판단을 하기가 제한됐죠. 역사학자 찰스 맥케이의 책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에서 이 사건을 '군중의 광기'로 묘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공부하시면, 현대의 비트코인 버블, 닷컴버블, AI버블과 비슷하다는 점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둘 다 희귀성과 미래 가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원인이었죠.

버블 경제의 기원2 - 영국 남해회사 버블사건
다음으로 남해 회사 버블을 살펴보겠습니다. 1720년 영국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정부와 민간 기업의 결탁이 초래한 대형 금융 사기였습니다. 남해 회사는 1711년 설립된 무역 회사로, 남미와의 무역 독점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무역은 거의 없었고, 회사는 영국 정부의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719년, 남해 회사는 정부 국채 3,100만 파운드를 인수하며 주식 가격을 끌어올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과장된 홍보를 통해 투자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예를 들어, 남미에서 금과 은을 캐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었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벌떼 같이 달려드는 현상이 생긴 겁니다. 주식 가격은 1720년 초 128파운드에서 6월에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습니다. 아이작 뉴턴조차 이 버블에 휘말려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전해집니다. 뉴턴 역시도 남해회사 주식이 폭등하자 큰돈을 투자했으나, 결국 주가 폭락으로 전 재산의 90%인 2만 파운드 그러니까 오늘날로 따지면 수십억에서 수백억 정도를 읽고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쨌든,남해 버블의 전개는 튤립 마니아와 유사하지만, 규모가 더 컸습니다. 영국 의회는 '버블 법'을 제정해 다른 회사의 주식 발행을 금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남해 회사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투자자들은 마진 거래 즉, 신용 구매를 통해 주식을 샀고, 이는 버블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1720년 여름, 회사의 실제 수익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가가 급락했습니다. 9월에 175파운드로 떨어졌고, 수천 명이 파산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경제에 충격을 주었고, 정부는 회사 임원들을 처벌했습니다. 이거 뭐 하고 비슷하죠? 닷컴 버블. 그리고 하나가 또 있는데 말은 못 하겠네요.
이 버블의 원인은 첫째, 정부의 개입과 정책적 뒷받침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국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해 회사를 이용하면서, 공식적인 신뢰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의 과도한 낙관을 유발했습니다. 둘째, 정보 비대칭과 과장된 홍보도 한 몪을 했습니다. 회사 측이 남미 무역의 잠재력을 허위로 강조하며 소문을 퍼뜨렸고, 투자자들은 회사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셋째, 신용 거래의 확대입니다. 마진 거래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빌린 돈으로 투자해 버블을 부풀렸습니다. 넷째, 사회적·경제적 환경입니다. 18세기 초 영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새로운 투자 기회에 대한 열광이 퍼졌습니다. 이 사건 후 영국은 주식 시장 규제를 강화했고, 이는 현대 증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제 관점에서 보자면, 이 버블은 오늘날의 붐과 닮았습니다. 둘 다 과장된 약속으로 투자자를 모았고, 회사에 대한 실체도 있었지만 고수익을 낼만한 경영 실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버블 경제의 기원3 - 프랑스 존 로(John Law) 사건
이제 존 로(John Law)와 관련된 미시시피 버블을 추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1716년부터 1720년까지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남해 버블과 거의 동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존 로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모험가로, 도박과 금융 이론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왕정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16년 Banque Générale라는일반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대규모 지폐를 발행한 은행으로, 프랑스 왕정이 지폐를 법정 화폐로 인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존 로는 지폐를 통해 통화 공급을 늘려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화폐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프랑스에서 크게 인정받았고, 1718년 은행을 왕립 은행(Banque Royale)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이어 1720년 1월, 그는 프랑스 재무총감(Contrôleur Général des Finances)으로 임명되어 왕정의 재정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1717년, 그는 미시시피 회사(Compagnie d'Occident)를 설립해 루이지애나 영토(미시시피 강 유역)의 무역과 개발 독점권을 얻었습니다. 회사는 프랑스 국채를 주식으로 교환하며 자금을 모았고, 주식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1719년 말, 주식 가격은 초기의 500리브르에서 1만 리브르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이 주가 상승은 주식에 대한 수요와 공급 관계로 인한 투기적 현상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국채 이자 지급이 불안정하고, 미시시피 지역의 경영 실적이 미미해 수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1719년 인도 회사(Compagnie des Indes)로 사명을 변경하며 더 큰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미시시피 버블의 광기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시시피 지역의 금과 은 광산, 무역 잠재력을 과장된 소문으로 믿고 투자했습니다. 존 로는 지폐를 무제한 발행해 신용을 팽창시켰고, 이는 유럽 최초의 지폐 기반 버블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720년 초, 지폐 과잉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미시시피 지역의 실제 개발이 미미함이 드러나면서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720년, 왕립 은행 관리를 사명을 변경한 인도 회사에 위탁한다는 포고가 나오자, 은행권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은행권을 주화로 바꾸려 몰려들면서 뱅크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720년 5월, 지폐 가치가 하락하고 주가가 폭락하면서 수백만 리브르의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존 로는 이 혼란 속에서 1720년 12월 몰래 프랑스를 탈출해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존 로가 설립한 회사 전체 주식을 폐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베네치아(베니스)로 이동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다 1729년 사망했습니다. 그의 말년은 초기의 화려함과 대조적이었죠. 생시몽 공작(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의 회고록(Mémoires)에서 존 로를 암시하는 글을 소개하면 더 흥미로울 것입니다. 생시몽은 존 로를 "스코틀랜드 출신의 야심 찬 사기꾼"으로 묘사하며, 그의 금융 계획을 "프랑스를 파멸로 이끈 광기"라고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왕국을 종이 조각으로 가득 채워, 진정한 부를 파괴했다"는 식의 암시가 있습니다. 이는 당대 귀족들의 시각을 반영하며, 존 로의 혁신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이 버블의 원인은 먼저, 존 로의 혁신적 금융 정책입니다. 그는 지폐를 통해 경제를 부양하려 했으나, 과도한 발행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유럽 최초의 지폐 실험이었지만, 통제 부족이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정부의 전폭적 지지입니다. 루이 15세 왕정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존 로를 후원하며, 회사를 국영화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로 투기 심리와 정보 왜곡입니다. 미시시피 지역의 부를 과장한 홍보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실물 가치 없이 투자했습니다. 넷째로 신용 팽창과 군중 심리입니다. 지폐 발행으로 돈이 넘쳐나면서 "놓치면 안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튤립이나 남해와 유사합니다. 이 사건은 화폐 정책의 위험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위 세 사건의 공통점 그리고 교훈
이 세 사건을 비교하면 공통점이 뚜렷합니다. 먼저, 비이성적 낙관주의입니다. 사람들은 가격 상승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지만, 이는 심리적 착오였습니다. 두번째 신용 팽창의 역할입니다. 쉬운 대출이나 지폐 발행이 버블을 부풀렸습니다. 세 번째로는 정보 부족과 소문의 영향입니다. 튤립은 희귀성, 남해는 남미 무역, 미시시피는 신대륙 부를 과장했습니다. 붕괴 후유증도 비슷합니다. 사회적 혼란과 경제 불신이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투기보다는 가치 기반 투자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튤립 마니아, 남해 버블, 미시시피 버블은 버블 경제의 시초입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시장의 광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에 투자자 시라면 금융의 역사에 대해서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